융리고성(隆里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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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리의 원명칭은 용리인데 원래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여섯째 아들 주정(朱桢)이 창립한 둔병성새로서 청조에 이르러서야 융성지소(隆盛之理所)의 뜻을 따서 융리로 고쳤다. 고진은 작지만 두갈래의 도로가 십자로 교차되여 동, 남, 서, 북 4개 성문을 연결하였다. 옛사람들이 중원의 강남 9개 성에서 이주하여 이 툰군에 들어왔기 때문에 후에 해갑으로 돌아와 이 땅에 융합되였으며 하여 지금의 융리는 검동남에서 유일하게 전부가 한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이다. 

그들의 생활 방식, 건축, 풍속 습관은 여전히 짙은 고대 건축 양식을 보존하고 있다. 건축은 북경 사합원의 멋스러움, 강남수향의 정교함, 강서 (江西) 성 민가의 구조 및 본토 묘족 · 동족 간란식 주택의 형식 등 여러 양식의 민가 건축물이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왕창링(王昌龄)은 융리에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융리의 후손들은 왕창령의 인생에 대한 동정심과 그의 학식에 대한 숭경심이 넘쳤다. 사람들은 용표산 기슭과 용계하변에 '장원묘' '장원교' '장원정' 등의 건물을 지어 이 문화인에 대한 영구 기념으로 삼았다.